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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름에 대한 찬양 - 버트런드 러셀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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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름에 대한 찬양 - 버트런드 러셀

sunyzero 2010. 6. 22. 18:08
게으름에대한찬양
카테고리 인문 > 철학 > 서양철학자 > 러셀/라이프니치
지은이 버틀란트 러셀 (사회평론,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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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Praise of Idleness.
- Bertrand Russell (1872~1970)


98세까지 살면서 빅토리아 시대, 산업혁명의 절정, 제국주의, 1, 2차 세계대전, 공산주의, 반공이데올로기, 경제공황, 자본주의의 수정 등 수많은 시대상을 경험한 철학자.

그가 냉철한 회의주의자적 시선으로 바라본 사회 문제들에 대한 에세이다.

책 제목은 게으름에 대한 찬양이라고 나왔지만, 실상은 뭐든 극단으로 흐르지 말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경계할 극단을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은 에세이를 적고 있다.

  • 게으름에 대한 찬양 - 일중독(workholic)을 경계하라. 당신은 노예가 아니다.
  • 현대 사회의 획일성 - 획일화의 극단으로 치닫으면 소수를 핍박하는 광기가 된다.
  •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가 - 교육의 문제
  • 내가 공산주의와 파시즘을 반대하는 이유, 사회주의를 위한 변명 - 이데올로기에 대한 집착

* 게으름에 대한 찬양 (In Praise of idleness)
현대인들은 너무 바쁘다. 물론 내가 말하는 현대라는 것은 러셀의 시대가 아닌 지금 2010년의 현대를 의미한다. 법적으로는 주5일 근무에 주40시간 근무를 해야 하지만 그런 사람은 없을 것이다. 심지어 주 7일에 주당 90시간정도를 일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그렇게 살아가는 사회가 과연 생산성도 높고 행복한 사회일까? 일을 많이 하는 사람을 칭송하고 심지어 과로하다가 죽는 사람을 영웅시 하는 다큐멘터리가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잠깐 멈춰서 생각해보자. 고대 로마의 노예는 일을 많이 했다. 일을 열심히 해서 인정 받으면 지주들이 더 많은 상을 주기도 했고, 때에 따라서는 해방시켜주기도 했다. 그래서 더욱 열심히 일을 했고 주인의 말을 잘 따랐다.

그러면 다시 현대로 돌아와보자. 어째서인지 고대 로마의 노예와 상당부분 흡사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간혹 과로하고 자신의 건강과 젊음을 희생하여 일한 사람에게 최고의 노예라는 영예의 메달을 주고 퇴장시킨다. 물론 보상은 충분히 해줄 것이다. 하지만 건강과 젊음, 친구, 사랑을 살수는 없을 것이다. 결국 trade-off로 바꾼 것이다.

그래서 러셀은 적당하게 일을 하면서 세상의 즐거움을 알아가려고 노력하고, 가족, 친구와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인생을 즐기라고 충고한다. 빵이 99개가 있는데도 1개를 더 만들려고 아둥바둥하다가 병들어 죽기에는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 현대 사회의 획일성 (Modern Homogeneity)
"사고나 여론이 획일화되는 것은 물질적인 생활 기구가 획일화 되는 것보다 훨씬 위험한 일이다"

대량생산체제가 가동되는 현대에서는 공산품뿐 아니라 사람도 획일화 된다. 어찌보면 사람도 교육과 매체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셈인데 이것들이 획일화 되다보니 모나고 특별한 사람은 허용되지 않는다. 이지매 문화도 여기서 등장한다.


물론 획일화는 다수가 쉽게 협동할 수 있게 하는 장점도 있다. 하지만 소수를 박해하고 묵살하기 때문에 소수는 등장하기도 전에 빛을 잃어버리게 된다.

특히 이런 획일화의 극단에서는 예술과 철학 분야는 모두 망가지게 된다. 예술이나 철학은 예외적으로 탁월한 존재가 필요한데 획일화에서는 그 싹이 자라기도 전에 뽑혀버리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획일화된 클래스는 계층간의 커뮤니케이션을 막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사회의 한 단면만 보고 자라게 된다.(단면만을 보고 자란 새싹들은 다른 계층의 삶을 이해하기 힘들게 된다.)

또한 획일화된 다수는 선동에 휘말리는 일도 쉬워지기 때문에 사회구성원이 극단적인 선택을 할 가능성도 있다. 이런 와중에 좋은 자질은 나쁜 자질보다 쉽게 파괴되므로 (나쁜 짓을 더 빨리 배우는 법이다) 다수가 퇴폐하게 될 가능성도 매우 높아진다.

따라서 건강한 사회가 되려면 어느 정도의 획일화도 필요하지만 그것이 극단으로 가지 않도록 관용도 가져야 한다. 적당한 충돌과 적당한 예외는 언뜻 보기엔 무질서하고 분열된 것처럼 보이겠지만, 실상은 사회를 좀 더 풍요롭고 다채롭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가? (Education and Discipline)
교육이란 기본적으로 2가지 기능을 내포하고 있다. 사회 구성원들과 협력하면서 살기 위한 도구로서의 기능과 고차원의 배움을 제공하는 기능이다.

첫번째 교육을 협력하면서 살기 위한 도구로서 보는 것이다. 이는 교육으로 도덕적, 정신적 소양을 기르는 것을 의미한다. 이 경우에는 방법론적으로 볼 때 자유와 통제의 2가지 측면에서 접근 할 수 있다. 자유를 옹호하는 측은 인간의 선함을 믿는 것이고, 통제를 옹호하는 측은 인간의 악함을 믿지 못하는 것이다. 둘다 근거는 있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지 극단으로 가면 실패하는 것을 역사가 가르쳐 주고 있다. 따라서 극단을 경계해야 한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자유의 극단을 걱정하기보다 통제의 극단을 걱정해야 한다. 현대사회는 더 빠른 정보교환과 촘촘한 법률 때문에 교육자들은 의무적으로 교육하고 통제하기를 바라는 시각을 가지는 경우가 많아진다. 이런 통제 환경 아래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커뮤니케이션의 최적수단으로 토론보다는 공포에 의한 통제를 우선시 하게 된다. 하지만 그 결과는 그 사회뿐 아니라 세계의 불행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히틀러와 그에 동조하는 독일인 같은 사람을 이미 경험했기 때문이다.(이 외에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도 비슷하다. 제국주의하에서 자란 노인세대와 그 후손들은 아직도 통제와 억압을 최상의 방법으로 인식하고 있다. 이는 현재진행되는 아픔이기도 하다.)

둘째로 고차원의 배움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고 싶지만 책에는 이 부분이 없다. 그래서 내 생각을 적으려고 했으나 쓸데없는 짓일 것 같아서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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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외에도 러셀은 여러가지로 극단에 휘둘리는 사회 현상들을 경고하고 있다. 그리고 그 극단에는 필히 막다른 골목이 있음도 경고하고 있다. 뭐든지 집착하거나 극단으로 흐르지 말자. 명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극단을 고집하게 되면 현실감이 떨어지게 된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유토피아가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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